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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大민족문화硏, 임진왜란때 선조가 내린 功臣교서 日교토대서 발견

高大민족문화硏, 임진왜란때 선조가 내린 功臣교서 日교토대서 발견

Posted March. 13, 2018 08:10   

Updated March. 13, 2018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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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자신의 말고삐를 잡은 마부에게 내린 보물급 공신교서(功臣敎書)가 일본에서 처음 발견됐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센터장 정우봉 국문학과 교수)는 지난달 18∼24일 일본 교토대 부속도서관 서고를 조사해 마부 오연(吳連)에게 내린 호성공신(扈聖功臣)교서를 비롯한 유물과 인쇄본이 극히 적은 경오자(庚午字·안평대군의 글씨로 주조한 금속활자) 간행 서적 등 귀중 고문헌 약 500책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호성공신은 선조가 자신을 의주까지 호종하는 공을 세운 86명에게 1604년 내린 것이다. 공신교서는 국내에 9개가 남아 있는데, 그중 6개가 보물로 지정돼 있다. 기존 교서는 문신(8개)과 의관(1개)의 것뿐이어서 ‘이마(理馬, 사복시·司僕寺에서 궁중의 말을 관리하던 잡직)’가 받은 공신교서가 발견된 것은 ‘오연교서’가 처음이다.

 이번에 발견된 교서는 “조정 안팎의 신하와 백성들이 대부분 짐승이 달아나듯 새가 숨어버리듯 하였는데, 너는 하례(下隷·낮은 신분)로서 임금을 뒤로 하지 않고 어가와 세자의 출정에 말고삐를 짊어지는 공을 이루었고”라며 오연이 낮은 신분임에도 충성을 다했다고 강조했다.

 오연은 석성군(石城君)에 봉해졌다. ‘용사호종록(龍蛇扈從錄)’은 그가 “부여(扶餘)의 정병(正兵)으로서 어가를 따랐다”고 기록했다. 박영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정병은 정규군으로, 오연은 양민 출신으로 군대에 갔다가 선조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당시 선조의 공신 책봉은 형평성 면에서 오늘날까지도 비판을 받는다. 전투에서 목숨 바쳐 싸운 장수 등에게 내린 ‘선무(宣武)공신’이 18명에 불과하고 그나마 주요 장수와 의병장이 제외된 탓이다. 반면 선조는 ‘호성공신’을 대규모로 책봉해 자신을 보좌한 이들은 마부까지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챙겼다. 그러나 당대 사신(史臣)이 호성공신을 “미천한 복례(僕隷·종)들이 20여 명이나 됐다”고 비판하며 이마를 비롯한 하층민의 책봉에 마뜩잖아 한 시각은 신분 차별적이라는 평가다.

  ‘비운의 활자’ 경오자로 인쇄된 ‘역대병요(歷代兵要)’ 유일본도 확인됐다. 당대 명필이었던 안평대군의 서체를 자본(字本)으로 만든 경오자는 당시에도 “책의 인쇄에 으뜸인 활자”로 평가됐지만 불과 6년(1450∼1456년)만 사용됐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뒤 안평대군이 썼다는 이유로 녹여버리고 새 활자를 만든 탓이다. 경오자로 인쇄된 서적은 국내외에 6종만 남아 있다.

 최다 인명이 기록된 19세기 중엽의 ‘만성보(萬姓譜·온갖 성씨의 족보에서 큰 줄기를 추려 모은 책)’ 40책 역시 발견됐다. 조선 후기에 작성됐으며 딸과 사위까지 포함했다. 조사에 참여한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연구실장은 “기존 만성보보다 3, 4배 방대한 분량”이라며 “과거 합격 이력, 관직, 혼맥 등 조선 지배 세력의 인적 네트워크를 파악할 수 있는 최대 ‘인물 뱅크’다”고 말했다.

 세종의 일곱 번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1427∼1445)의 장서인 ‘근행지당(謹行之堂)’이 찍힌 ‘대학연의(大學衍義)’도 포함됐다.

 이번 조사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자료센터 사업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정우봉 교수는 “한중연의 이 사업은 10년간 진행됐으나 연장안이 정부 예산 심의를 통과하지 못해 올해 6월을 마지막으로 해외 조사도 잠정 중단된다”며 “한국학 연구의 보고(寶庫)인 해외 자료 조사가 장기적 안목으로 지속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종엽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