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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집도 알고 있다

Posted February. 02, 2019 07:28   

Updated February. 02, 2019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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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 총장님 게 어디 갔지?”

 얼마 전 청와대 인근의 한 음식점. 일행 중 한 명이 벽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서명이 담긴 액자가 안 보여서다. 이 식당 벽엔 유명 인사들의 서명 액자가 많다. 유엔에 가기 전부터 오랜 단골인 반 전 총장의 액자는 한동안 가장 잘 보이는 벽에 있었다. 직원에게 물으니 “(대선 주자로 거론되던) 2017년 초까지는 걸려 있다가 대선 후 ‘덜 잘 보이는’ 곳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2.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구속된 다음 날인 지난달 31일. 냉면 생각이 나서 서울 무교동의 한 노포(老鋪)를 찾았다. 반 전 총장 단골집 이상으로 유명 인사들의 서명 액자가 많은 곳이다. 계산을 하러 카운터에 갔더니 문재인 대통령의 서명 액자가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런데 바로 아래 누군가의 액자가 있었다. 다른 액자들은 옆으로 한 칸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건 거의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윤석열이라고 써 있었다. 직함은 따로 적지 않았으나,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의 서명이었다. “2017. 6. 17. ○○면옥은 마음의 故鄕(고향)입니다”라고 썼다. 동명이인이거나 윤 지검장을 ‘사칭’했을 수 있겠으나, 윤 지검장이 다른 공개 문서에 서명한 것을 보니 동일한 필체였다. 직원에게 물었더니 “잘 보이는 데 걸려있는 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서울 시내, 특히 청와대와 가까운 오래된 음식점에 가면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종종 짐작할 수 있다. 반 전 총장이야 대선 레이스에서 중도 하차했으니 그렇다 치고, 무교동 냉면집은 왜 윤 지검장의 서명을 이렇게 배치했을까. 집권 3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문재인 정부 하면 아직까지 적폐청산이 가장 먼저 떠올라서가 아닐까 싶다. 다른 수많은 유명 인사들보다 ‘적폐청산의 아이콘’인 윤 지검장이 적어도 냉면집에선 자주 회자된다는 방증. 소득주도성장, 2차 북-미 정상회담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파급력은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 시작해 2018년 이명박 전 대통령, 2019년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으로 이어지는 적폐청산 드라이브가 한 수 위라는 얘기다. 김 지사의 구속도 여당은 ‘양승태 적폐세력의 보복 재판’이라고 주장하는 만큼, 넓게 보면 적폐청산 이슈에 들어있다. 하긴 대통령수석비서관 중 정무, 국민소통, 경제 등 다른 핵심 수석들은 다들 교체됐지만 새해 들어서도 조국 민정수석은 굳건하다. 적폐청산, 사법개혁 이슈를 계속 수행하라는 것이다.

 김 지사 구속 후 정치권은 어느 때보다 강력한 적폐청산 이슈의 후폭풍에 휩싸이고 있다. 급기야 여당은 삼권분립을 무시하고 야당은 대선 무효를 언급하며 막가파식으로 충돌하고 있다. 정치 원로들은 ‘사법 폭풍’에 정치가 최소한의 자존심과 존재감도 못 지키고 있다며 절망하고 있다. 한 여권 중진은 “지금 우리는 전례 없이 검사와 판사가 온 나라를 휘젓는 사법 공화국에 살고 있다”고 했다. 야권 중진은 “여야가 툭하면 모든 이슈를 검찰 수사에 맡기며 자해행위를 하고 있다. 이러면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도 설 자리가 없다”고 했다.

 지난해 7월 취임 후 “이젠 국회의 계절”이라며 그 나름대로 정치 복원을 위해 동분서주해 온 문희상 국회의장도 요새 좌절감을 토로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주변에 “곧 봄이 올 텐데, 국회에도 꽃이 필까?”라며 씁쓸해했다고 한다. 유감스럽지만 기자 생각엔, 지금처럼 청와대와 서초동에 휘둘리면 한동안 정치의 꽃은 못 필 것 같다.


이승헌 ddr@donga.com